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가디슈 전투 (문단 편집) === 평화유지군 파병 === 이렇듯 콩가루가 된 소말리아의 상황에, UN에서는 임시정부에게 연합정부를 세우고 민간인부터 챙기라는 권고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소말리아 임시정부는 이 조치를 듣기만 했지 일단 정권을 차지해야 그러거나 말거나 할 노릇이라 실제로 행해진 것은 없었다. 이후 UN은 1992년 1월, 733 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 이 내용은 소말리아에 대한 무기금수 조치였다. 사실 별 실효는 없었던 것이 1980년대 시아드 바레 정권 말기에 이미 군벌화와 내전이 오랫동안 진행되면서 무기라는 무기들은 이미 충분히 소말리아 내부에서 돌고 있었고, 금수결의안을 통과시키거나 말거나 수입될건 다 수입되고 있었다. 애초에 소말리아 군벌들은 특정국가에서 무기를 정식으로 수입하는 게 아니라 아토와 같은 무기 밀매상에게 무기를 유통했으니 무기 금수 결의안이 나온다고 해서 변할 것은 없었다. 결국 1992년 4월 24일, 막장으로 치닫는 소말리아의 내부사정을 수습하기 위해 UNOSOM-1(United Nations Operation in Somalia I)으로 명명된 작전이 시작되었다(결의안 751). 사실 애초에 UNOSOM-1의 목적은 군벌 간의 휴전협정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서 UN에서 파키스탄의 임티아즈 샤인 준장을 필두로 한 옵저버 50명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태가 악화 일로로 가면서 UNOSOM-1의 규모는 8월 27일 무장병력 3000명의 추가 투입으로 크게 불어났고, 이후 소말리아 기근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9월에 1000여 명의 보급부대가 추가되면서 인원은 4,219명의 병력과 50명의 옵저버라는 대규모 인원으로 증폭됐다. 결국 UNOSOM-1은 졸지에 식량배급까지 도맡아 하면서 1992년 한 해에만 소말리아에서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 약 200만 명의 아사자를 최종적으로 많이 줄이는 성과를 거뒀다. 그럼에도 워낙 기근이 심각했기에 '''7~8만 명의 어린이'''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기다가, 그 와중에 소말리아의 군벌들이 자신들의 세력 강화와 지지도 확보를 위해 이 UN 원조 식량을 탈취하는 일도 발생했으며, 불과 한 달도 안 돼 군벌들에 의한 식량탈취는 사실상 일상이 되어버렸다. 10월 28일, 어찌어찌 아사자 문제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아이디드는 UN철군을 주장하고 나섰다. 사실 내전기간 동안에 실전을 겪은 아이디드는 USC 내부에 파벌을 두고 있었고 이 파벌은 '소말리아 국민동맹(Somali National Alliance, 약칭 SNA)'를 개설했는데 USC의 주도권을 이 SNA가 장악하게 되면서 내전이 진행되면 결국은 아이디드의 승리로 끝날 상황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확실한 성공 대신에 불확실한 투표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이디드는 소말리아 주의를 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이때 명분은 '모가디슈 공항이 UN군의 관할에 있는데 이게 부당하다'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진짜 사고는 이후에 나오는데, 11월 13일에 파키스탄군을 공격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나온 UN은 미국에 미군 파병을 요청한다. 이것이 12월 3일에 나온 794 결의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